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대 이집트 (문단 편집) == 군사 == 고대 이집트 군대는 전성기 시절 그 규모가 '''10만 명'''이 넘었으며 지중해 세계에서 손꼽힐 만큼 굉장히 강력한 정예군이었다. 다만 훈련도가 높고 막대한 군비 지출 덕분에 정예군이었던 것이지 기술이나 전술 따위는 다른 국가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고왕국과 중왕국 시절까지만 해도 이집트 군대는 원시적인 창과 칼, 그리고 가죽을 덮어 만든 나무 방패 등이 주요 무기였으며 별다른 점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집트 제2중간기|제2중간기]]에 [[힉소스인]]들이 침략하면서 상황이 반전된다. 힉소스인들은 신무기였던 [[전차]]를 몰고 이집트에 들어왔고, 힉소스인들을 상대하면서 전차의 위력을 실감한 이집트인들은 제2중간기가 끝나고 들어선 신왕국 시대에 본격적으로 거대한 전차 부대를 운용했다. 힉소스인들이 이집트에 들여온 것은 전차뿐만이 아니었다. [[말(동물)|말]]과 합성궁도 힉소스인들과 함께 유입되었는데, 이로 인해 이집트 군대의 구성이 급속도로 바뀌었다. 또한 인근의 [[히타이트]]가 조악하기는 하지만 분명히 철로 주조한 철제 무기의 사용으로 급격히 강력해지자 이집트 역시 [[철기]]를 받아들여 군대의 질을 급격히 높였다. 덕분에 신왕국 시대 이집트 군대는 역사상 최강의 세력을 자랑할 수 있었다. 신왕국의 첫 왕조인 제18왕조는 군마와 궁병을 군대에 도입하는 한편 거대한 수의 전차를 만들어 전차 부대를 아예 따로 만들었다. 이집트인들은 단순히 전차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전차를 신식으로 개량했다. 이로 인해 이집트의 전차는 중동의 전차들보다 훨씬 가볍고 기동성이 좋았다. 보통 전차에는 2명이 탔다. 전차를 모는 기수가 앞에서 말의 고삐를 잡고 있으면 그 뒤쪽에 병사가 타서 적군을 공격하는 방식이었는데, 주로 활을 쏘아 멀리서부터 적을 제압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14855_1294397956_large.jpg|height=3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ncientegyptianwarfare.jpg|height=300]]}}} || || '''{{{#A0522D 파라오와 병사의 모습[* 파라오가 쓰고 있는 저 독특한 모습의 푸른색 관을 '케프레시'라고 부른다. 보통 파라오가 전투에 나갔을 때 착용하던 왕 전용 전투모였다. 또한 병사가 들고 있는 특이하게 생긴 휘어진 검은 [[코피스]]라고 한다.]}}}''' || '''{{{#A0522D 일반적인 전차병들의 모습}}}''' || 화살을 다 쏘면 가지고 있는 짧은 창을 뽑아 싸웠으나, 전차를 탔다고 해도 적진을 휘젓고 다니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화살이 떨어지면 즉시 본진으로 귀환했다. 또한 병사와 기수는 모두 상체에만 가볍게 비늘갑옷을 걸쳤는데, 하체는 전차가 막아주었기에 굳이 무거운 갑옷을 입을 필요가 없었던 것. 하지만 이 비늘갑옷조차 입지 않고 넓은 가죽 밴드에 방패를 달아 그걸 달고 다니는 경우도 많았다. 보통 [[파라오]]가 전장에 직접 나서면 이 전차에 탄 모습이었다. 파라오가 모는 전차는 4마리의 말들이 끌었으며 왕은 보석과 황금으로 호화롭게 치장된 갑옷을 따로 입어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하체에도 킬트 하의에 구멍을 뚫고 청동판들을 달아 보호할 수 있도록 했다. 참고로 고대 이집트 보병들은 대부분이 '''[[갑옷]]을 입지 않았다.''' 혹독한 아프리카의 더위 때문에 안 그래도 체력 소모가 심한 전장에서 갑옷을 입고 다니는 건 득보다 실이 더 컸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전차병 정도나 되어야 비늘갑옷이라도 입고 다녔지, 일반 보병은 갑옷은커녕 그냥 킬트에 천옷 차림으로 전투에 임했다. 이집트 고왕국과 중왕국 시대에는 아예 갑옷이라는 존재 자체가 없었으며 그나마 신왕국 시기부터 몇몇이 갑옷을 입기 시작했는데 그것마저도 어깨와 복부를 가로지르는 넓은 가죽 밴드를 착용하는 것에 그쳤다. 갑옷도 없으니 당연히 전투모도 헬멧도 없었다. 파라오는 예외적으로 푸른 왕관 '케프레시'를 쓰거나 특별한 황금 투구를 쓰곤 했는데, 이 역시 머리를 보호하는 실용적인 용도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컸다. '고대 이집트 무기'하면 떠오르는 독특한 형태의 칼은 '''[[코피스]]'''라고 부른다. 전체적으로 휘어진 곡도의 외양에 맨 끝부분만 날카롭게 버려진 모습인데, 길이는 약 50~60cm에 이른다. 검의 안쪽 휘어진 칼날을 이요해 적의 팔을 가두거나 적의 방패를 쳐낼 수 있었다. 기원전 3000년부터 기원전 1300년까지는 널리 사용되었는데 심지어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도 투탕카멘이 직접 사용하던 코피스가 발견된 바 있다. 하지만 [[이집트 신왕국]] 이래로 점차 사용 빈도가 감소하더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는 거의 사라졌다.[* 물론 아예 사라진 건 아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 만들어진 [[로제타석]]에도 코피스의 모습이 상형문자로 새겨져 있다.] 하지만 그 독특한 외양 덕분에 인기를 얻어 사실상 고대 이집트를 상징하는 무기 중 하나로 꼽힌다. 이집트 군대는 [[활]]과 [[화살]]을 알차게 써먹었다. 멀리서부터 적들을 제압할 수 있었던 활은 이집트 군대에 안성맞춤이었고, 덕분에 활은 이집트 보병의 핵심무기로 완전히 굳어졌다. 이집트인들이 쓰던 활은 모두 나무로 만들었다.[* 파라오가 쓴 활은 고급 [[상아]]나 무소 뿔로 만들었다.] 고왕국과 중왕국 시기에 쓰던 활은 나무를 깎아 몸통을 만들었고, 동물의 힘줄이나 식물 섬유를 꼬아 활줄을 만들었다. 선왕조 시절에는 이중 곡률을 가진 활도 썼지만 고왕국 시대에 들어오면서 단일 아치를 가진 단순한 형태의 활이 주로 쓰였다. 화살은 갈대로 만들었고, 꽁무니에 새 깃털 3개를 붙였고 앞쪽에는 돌이나 청동으로 만든 쐐기촉을 붙였다. 활의 크기는 대략 1m에서 2m 정도의 사이즈였고, 보통 가죽을 활에 감아 강화했다. 신왕국 시대에는 [[힉소스]]의 유산으로 합성궁이 출현했다. 현재 우리가 떠올리는 일반적인 활의 이미지가 바로 합성궁이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무기였던 합성궁은 크기 대비 훨씬 빠르고 유연하게 공격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사정거리는 이전보다 훨씬 증가했고, 합성궁이 등장하기 이전에 쓰이던 단궁은 합성궁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합성궁도 단점이 있었다. 당시 이집트의 합성궁은 일단 재료가 비쌌고, 습기에 약했으며 재장전을 하기 위해서는 옆에 있는 사람이 따로 화살을 끼워주어야 했다. 당연히 아무나 쏠 수 있는 활이 아니었고,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나 전문적인 최정예병들만이 쓸 수 있었다. 일반 병사들은 그냥 이전부터 쓰던 단궁을 써야만 했다. 활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무기가 바로 [[창]]과 [[슬링]]이다.[* 돌을 날리는 돌팔매는 전투에서 활화살 다음으로 많이 사용되는 무기였다. 전장에서 바로바로 [[돌|무기]] 수급이 가능했고 경제적이었을뿐더러 사용하는 방법도 쉬웠기 때문. 허나 벽화에 돌팔매가 묘사된 경우는 극히 드물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극초기부터 창을 개발해서 쓰고 있었으며 창병은 이집트 군대의 핵심 병종들 중 하나였다. 창은 만들기도 쉬웠고 생산단가도 저렴해서 많은 병사들이 애용했다. 가끔씩 청동으로 날을 달아주는 경우도 있었으나 청동이 그렇게 값싼 물건이 아니라서 상당수 이집트인들은 그냥 나무를 날카롭게 깎거나 돌을 창끝에 붙여서 사용했다. 특히 전차병들은 창을 하나씩 구비하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전차병들이 화살을 다 쏘고나면 창으로 도주하는 적들의 등을 찔러 제압할 수 있었기 때문. [[파라오]] [[세티 1세]]가 직접 창을 사용하기도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그 외에 반원형 도끼, 철퇴, 단검 등도 즐겨 사용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42c1cde22228a4b86106aa8496ea3a21.jpg|height=26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0_Oe_cNkjqtGfyFZ8n.jpg|height=26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441979009_figurok-voinov-iz-grobnicy-nomarha-mesehti.jpg|height=260]]}}} || |||||| '''{{{#A0522D 고대 이집트의 병사들}}}''' |||||| [[방패]]는 선왕조 시대 이래로 이집트 병사들이 반드시 들고 다니는 필수품이었다. 나무틀 위에 소가죽을 씌워 만든 1~1.5m 사이즈였고 위쪽으로 갈수록 뾰족해지는 형태였다. 초창기에는 방패도 사이즈가 컸다. 아직 소아시아 국가들과 싸우기 전까지는 주로 이집트인들끼리 화살 공세를 퍼부었는데, 이때 넓은 방패는 매우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차 소아시아와 충돌이 잦아졌고, 전투용 도끼나 검을 휘두르는 소아시아 병사들을 상대로 근접전을 벌이기 위해서는 기동성이 극대화되며 시야가 보장되는 작은 방패가 더 나은 선택이었다. 결국 신왕국 시대 들어 방패는 점점 크기가 작아졌고, 방패를 아래로 내려찍기 위해 아래쪽이 점점 뾰족해졌다. 병사들은 방패에 달린 끈을 들고 다니기도 했고, 아니면 양손을 쓸 수 있도록 어깨에 끈으로 매달아 몸 한쪽만을 보호하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러면 방어력은 확연히 떨어지지만 대신 기동성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다.] 신왕국 시대에 돈 있는 사람들은 특별히 청동으로 방패를 만들기도 했다.[* 청동 방패가 항상 나무 소가죽 방패보다 방어력이 좋지는 않았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고대 이집트식 방패를 재현하려고 청동 방패와 나무 소가죽 방패를 하나씩 만들었는데, 청동 방패는 충격에 깨어진 반면 소가죽 방패는 공격을 잘 막아냈다고 한다.] 이집트 군대는 크게 보병과 기병, 그리고 전차병으로 이루어졌다. 보병은 [[징집|징집병]]과 용병이 섞인 혼성 군대였는데, 보통 봉급을 받거나 전쟁에서 얻어낸 전리품을 나눠주는 방식으로 보상을 해주었다. 보병들은 출신들도 가지각색이었는데, 고왕국 시기부터 누비아인들이 본격적으로 합류했고 나중에는 시리아, 소아시아, 페니키아, 그리스 등 수많은 곳들에서 이집트에 몰려와 돈을 받고 대신 싸워주었다. 이집트 군대의 핵심은 보병이 아니라 전차병이었다. 기원전 1550년경에 세워진 신왕국 이래 전차 병단이 탄생했는데, 전차라는 무기 자체가 만들기도 어렵고 관리하는 데에도 돈이 많이 들어갔기에 보통 전차병을 맡는 사람들은 부유층이거나 신분이 높은 고관 계급이었다. 일반적으로 2마리의 말들이 전차를 끌었다. 전차는 기동성이 극도로 뛰어나 치고 빠지기에는 그만이었고, 특히 말들의 엄청난 진격 속도로 인해 파괴력도 엄청났다. 그래서 파라오나 군 사령관들은 전투 초기에 멀리서 활을 쏴 적진에 혼란을 불러온 다음, 직후 전차병들을 진격시켜 적의 진형을 무너뜨리고 전차를 물린 다음 적들이 흩어진 틈을 타 쓸어버리는 전술을 주로 썼다. 보통 전차 하나에는 2명의 병사가 탔다. 기수 '케이젠'은 말의 고삐를 잡고 전차를 조종했고, 나머지 한 명의 병사 '세네니'가 기수 뒤에 서서 활이나 창, 칼을 쓰면서 적병들을 죽였다. 전차의 주력인 세네니는 귀족 출신인 경우가 많았고 케이젠은 경험 많은 병사나 시종이 맡아 세네니를 보호해주는 역할을 했다. 특히 [[아멘호테프 2세]]가 전차를 기막히게 잘몰았다고 한다. 전차병들은 이집트 군대 내부에서도 최고의 엘리트병들이었다. 전차병들은 '마르야누', 즉 '젊은 영웅'이라고 하여 특권 계급을 형성했고 [[파라오]]들은 항상 전투에서 전차를 타고 적들을 쏘아 죽이는 모습으로 묘사됐다. 하지만 전차가 무적은 아니었다. 전차는 지형을 크게 탔는데 조그마한 돌덩이 하나에 아예 뒤집어질 수도 있었고 현대의 [[탱크]]와 비교하기에는 미안할 정도로 돌파력이 약했다. 당시의 전차는 현대에 비해 훨씬 내구력이 약했기에 돌진해서 빽빽하게 모여 있는 적의 진영을 분쇄하는 건 힘들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